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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6년에는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함경도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 에 임명되었고 그 뒤에도 여러 관직을 거쳐 1586년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 와 그 다음해 녹도둔전관(鹿島屯田官) 을 겸하게 되었다. 그 곳에서 장군은 북병사 이일(李鎰)의 모함을 받아 첫번째 백의종군 을 하게 되었다. 1589년 정읍현감이었던 장군은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조방장(助防將) 이 되었고 1591년 2월에는 서애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어 거북선을 만드는 등 임진왜란에 대비하였다.

1592년 4월 13일 왜적이 부산을 침략하자 장군은 5월 4일 첫 출전을 하여 <옥포해전> 을 시작으로 그 뒤 7월 8일 <한산대첩> , 9월 1일 <부산해전> 등 크고 작은 전투에서 연전연승하고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 후 정유재란 이 발발하기까지 해전은 거의 소강 상태로 들어 갔으나 왜구가 침략할 것을 대비하여 평소 전쟁준비를 하던 중 조정에서는 이른바 '요시라 첩보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1597년 3월 4일 장군을 투옥시켰다. 그 뒤 장군은 많은 옥고를 치르고 4월 1일 출옥하여 두번째 백의종군 의 길에 오르게 된다. 한편 원균이 거느린 우리수군은 7월 16일 칠천량 싸움에서 거의 전멸상태에 이르러 조정에서는 7월 22일 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하였다.

그 뒤 8월 15일 보성(寶城) 열선루(列仙樓)에서 우리수군을 전폐하라는 조정의 밀지를 받고 "아직도 배 12척이 있고 신이 죽지 아니하였으니..." 라는 장계를 올리고 또 그 유명한 '한산섬의 노래(閑山島歌)' 를 지어 읊으면서 해전지휘관으로서의 책임감과 고독함을 달래곤 하였다. 9월 16일에는 단지 13척의 전선으로 10대 1의 열세 하에서 적선 31척을 크게 쳐부수어 세계 어느 해전에서도 그러한 전과를 찾아볼 수 없는 <명량해전> 을 거뒀고, 이어서 발음도(發音島:전라남도 신안군)에서 진을 치고 머무는 동안에도 해남 울돌목을 비롯, 해전과 육전에서도 크게 승리하였다.
그 후 보화도(寶花島:전라남도 목포)에서 100여일 머물다가 1598년 2월 고금도(古今島)로 다시 진을 옮겼으며 그 해 7월에는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陳璘)과합진함으로써 해상전력을 강화하였다. 이때 풍신수길의 유언에 따라 왜적이 철수하게 되자 한척의 배도 놓치지 않겠다는 굳센 각오로 11월 19일 남해

노량에서 적선 200여척을 부수어 <노량해전> 을 마지막으로 장식하였다. 이때 장군은 "지금은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단 말을 내지 마라"란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54세의 일기로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장군은 임진왜란(1592~1598)으로 풍전등화와 같았던 나라의 운명을 구해낸 구국의 명장이었다. 또한 시문에도 탁월했던 장군은 전쟁의 와중에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난중일기(亂中日記)』 를 비롯, 장계(狀啓), 어머님을 찾아뵙기 위해 체찰사 이원익에게 휴가를 청하는 눈물겨운 편지인 '상체찰사 완평 이공 원익서(上體察使 完平 李公 元翼書)', '한산섬의 노래(閑山島歌)' 등 여러 편의 시와 시조를 남겼다.

이순신 장군의 전생애는 그 모두가 충(忠)효(孝)로 점철된 우리민족의 위대한 표상으로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