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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일어난 국내외 배경은 오랜 내전을 통해 무력을 키워온 일본이 통일 이후에 잉여 무력의 배출구로서, 상대적으로 정쟁과 당파싸움에 빠져 무력이 약화된 조선을 쉽게 이길 수 있다는 오판을 하여 일으킨 전쟁이다.

1590년 오랜 기간의 전국시대를 거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중소 영주국들을 통합하던 술책은 좋은 영지를 보장해 주겠다는 외교술이었다. 이에 조선과 명을 다수의 영주(다이묘)들에게 재분배하여, 그들의 영지 확장 욕구를 충족시켜 준다는 명분과, 오랜 전쟁으로 엄청난 수로 양성된 무사(사무라이)들의 위협으로부터의 해결책으로 조선의 침략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침략에 앞서 일본은 일본의 새 왕을 승인하고 축하해주기를 간절히 간청하며 통신사를 파견해 주기를 요청하는 사신을 보내왔으니 이는 내세운 대의명분일 뿐 일본의 저의(底意)는 조선을 염탐하고자 했던 것이다.

조선은 일본의 이 저의(底意)를 파악하지 못하고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 西人),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 東人), 서장관(書狀官) 허성(許筬)이 이끄는 200여명으로 구성된 대규모의 사절단을 보내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조선의 통신사들에게 ‘일본이 명을 치고자 하니 함께 명을 치거나, 길을 열어 달라’는 요구를 하였다. 사절단은 약 1년 만에 조선에 돌아와 선조에게 보고를 하였는데, 정사 황윤길과 허성은 일본이 침략할 것이라 주장하며 징집과 훈련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군병은 왕권을 위협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왕으로, 1583년(선조 16년)에 이이(李珥)사회개혁안'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쳤으나 이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은 물론 경연에서 남왜북호(南倭胡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한 ‘십만양병설’을 흘려버린 왕이었다.
따라서 황윤길과 허성의 주장은 받아드리지 않으려 하는 반면, 볼품없이 작고 천하게 생긴 히데요시의 외모를 말하며 침략은 없을 것이라고 보고하는 김성일의 보고를 받아들여 ‘침략은 없다’고 단정하고 김성일에게 통정대부(정3품 당상관)벼슬을 제수한다.
그러나 이러한 당파 싸움의 와중에도 진정으로 나랏일을 걱정하는 신하였던 유성룡(柳成龍)은 비록 과거 이이의 ‘십만양병설’으 반대했었으나 일본의 침략을 예상하고, 당시 정읍 현감인 이순신(李舜臣)과 은밀히 논의하며 침략에 대비한다.유성룡은 이순신을 정읍현감에서 진도군수로, 이어 고사리진(高沙里鎭)의 첨사로, 수 일 후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발령하였다.

1591년 2월 16일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에 부임하여 비로소 전쟁에 대비할 수 있었다.

 
   
 
연도
구분/해당연도
1592
임진년
1593
계사년
1597
정유년
1598
무술년
전투횟수
70
17
10
8
105
조선
공격
43
15
2
8
68
승리
40
14
5
6
65
일본
공격
27
2
8
-
37
승리
30
3
5
2
40
관군 단독전
19
8
5
6
38
의병 단독전
9
1
-
-
10
관군主
의병助
6
5
-
-
11
의병主
관군助
6
-
-
-
6
朝ㆍ明 연합전
1
2
2
3
8
 
 
   
 
년도
월일
결과
04. 14
04. 15
04. 18
04. 19
04. 21
04. 24
04. 26
04. 28
04. 28
05. 02
05. 07
05. 07
05. 08
05. 29
06. 02
06. 05
06. 05
06. 05
06. 07
06. 14
07. 08
07. 08
07. 08
07. 09
07. 10
07. 17
07. 18
07. 27
08. 01
부산진성 함락
동래성 함락
밀양성 함락
김해성 함락
경주성 함락
상주성 함락
문경 상실
충주성 함락
추풍령 돌파
서울 함락
일 전함 26척 격파
일 전함 5척격파
일 전함 11척격파
일 전함 13척 격파
일 전함 21척 격파
일 전함 26척 격파
5만군사 1600명에게 분산
회양성 함락
일 전함 7척 격파
평양성 함락
웅치 돌파
이치 사수
일 전함 56척 격파
전라도 방어 성공
일 전함 20척 격파
최초의 연합전
조선군 전멸
영천성 탈환
평양성 탈환전
 
 
 



1368년 개국된 명은 15세기 초인 성조 영락제 때에 이르러 그 국세를 크게 떨쳤다.
그러나 성조의 사후로는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제6대 영종대인 1449년에 황제가 몽고의 오이라트부를 친정하다가 도리어 패전하여 포로가 된 '토목보의 변'을 계기로 명의 국제적 영향력이 약화되고, 내부의 기강이 땅에 떨어졌다.
16세기 무종 때에 이르러서는 환관이 국정을 전횡하는등 정치적 혼란은 극에 달했다.
무종을 계승한 세종은 전대의 정치적 폐단을 혁신하여 명은 한 때 중흥의 기미를 보였으나, 이 무렵부터 기세를 떨치기 시작한 왜구집단은 명제국의 병경 해안지대를 휩쓸어 제국의 존망을 위협하였다.
이에 따라 명은 북으로는 몽고족의 침입을, 남으로는 왜구의 침입을 막아야 하는 이른 바 '북로남왜'의 우환에 시달리는 상황은 자연히 명의 쇠퇴를 가속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 후 명은 신종 즉위 초년의 이른 바 '만력의 치'라는 개혁의 시대를 맞이하여 한동안 정치, 경제, 국방 등 다방면에 걸쳐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나, 만력 10년 이후로 들어서면서부터 황제가 정사를 멀리하고, 사치, 방탕에 빠져들어 황실의 지출은 증대하여 국고가 탕진되고 조정의 정치 기강이 해이되어 환관이 국정을 어지럽히는가 하면, 관료들은 붕당을 이루어 대립 반목함으로써 명의 정국은 혼란을 거듭하였다.
   
 



1392년 일본에서는 무로마치 막부의 제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남북조의 분열을 종식시키고 전국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그 후 15세기 중엽에 이르러 봉건영주세력에 대한 쇼군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지방의 봉건영주인 슈교다이묘들이 사분오열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1467년의 '오닌(應仁)의 난'을 계기로 무로마치 막부가 몰락하고 그러부터 백여년 동안 군웅이 할거하는 전국시대가 개막되었다. 이 혼란의 시기에 지방의 신흥무사집단이 구세력인 슈고다이묘 집단을 대신하여 자립태세를 갖추어 전국대명으로 등장하였다.
그러던 중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오다 노부나가가 출현하여 다수의 경쟁세력을 굴복시키고 일본의 실질적 지배권을 장악함으로써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어 갔다.

그러나 1582년 오다가 그의 부장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피상당하는 이변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실권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인물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로 돌아가고 말았다.

도요토미는 아카치의 반란세력을 토벌하고 오다의 유지를 계승하여 일본의 통일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그는 이과정에서 1585년에는 간바쿠(關白)와 다조다이진(太政大臣)의 지위를 겸임하고 천황의 권위를 빌려 1590년에는 일본 전국을 통일하여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도요토미 정권은 전통 있는 가신집단을 보유하지 못하고 다이묘 세력들을 일시적으로 결합시켜 놓은 연합정권에 불과하다는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도요토미는 이러한 자기 정권의 약점을 은페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대규모 대외원정이라는 책략을 안출해 냈다. 그의 이러한 책략은 표면상으로 정복 대상 지역인 조선과 명의 광대한 영토를 재분배하여 다이묘 세력들의 영지확장욕구를 충족시켜 준다는 것이었으나, 그 이면에는 대외원정을 통하여 봉건 다이묘들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려는 저의가 내포되어 있다.
이와 같은 조건하에서 도요토미는 명과 조선을 정벌하여 일본 영토로 삼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구체적인 노력으로서 전쟁을 도발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