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거북선의고향 > 좌수영사람들 > 5관5포인물
 
역의암과 여기암 벌통수박 노루섬이야기 흰비 쏟아지는 밤의 곡성 무슬목전투 투구성터 이순신과 송구봉 화치노적산 망마산 상.하 화도 신성포와 야죽불 할아버지의 도움 처녀 원혼과 장군
현위치 : 순천으로부터 소라면,덕양으로 들어오는 입구
임진난 때 이충무공이 갑자기 많은 왜적을 만나자 백성과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푸른빛과 붉은 빛의 옷을 나누어 입고 어지럽게 서로 바꾸게 하니 왜놈들이 바라보고는 물러가 버렸다.
-여수읍지-

임진왜란 때 한 女妓가 이 바위 가지 쫓아온 왜군에게 붙잡히자 오욕을 물리치고 투신하여 죽었다는 전설이다.
-강남악부-

옛날에는 역의암까지 물이 들어 왔는데 거기서 이순신 장군이 묘계로 군인들에게 옷을 서너 가지를 입혔다. 흰 옷을 입고 한 바퀴 돌고 제자리로 와서 노랑 옷을 입고 한바퀴를 돌고 해서 왜적들이 그걸 보게 했다. 그렇게 의복을 갈아 입혀서 전쟁을 한 곳이다 해서 역의암이다 그 역의 바구가 산꼭대기에 서있다. 우리가 호칭하기로는 맷돌바구란 곳이다. 그 산을 처음에는 검은 옷을 입고 나중엔 붉은 옷, 푸른 옷을 입고 돌았다. 옷을 바꿔 입고 그 바위를 돌았다 해서 역의바구다.

덕양 뒷산에 있는데 저 묘도 바닥에서 보면 잘 보인다. 여의암 동쪽으로 바다다. 왜적들이 쳐들어 올 때 우리 군이 작으니까 부인들을 군복을 입혀 가지고 우리도 이만한 군사가 있다고 자랑하기 위해서 산꼭대기를 순회하게 했다. 그래서 여의암이라 한다.
현위치 : 율촌면 장도
정유재란 대 순천 해룡면 신성포에는 왜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이 충무공이 거느린 우리 수군은 장도에 진을 치고 대치하고 있었으며 육군은 신성포를 중심으로 포위하고 있었는데 신성포 왜교성을 얼마나 튼튼히 쌓았는지 난공불락이었다. 이 때 이 지방 출신 의병들이 잘 익은 수박 수 십 통을 따와서 수박 속을 전부 굵어내고 그 속에 벌 수 십 마리씩 집어넣어 물때와 바람을 이용하여 모래목(현재 율촌면 여흥 3구)에서 한밤중에 신성포 왜교성으로 띄워 보냈다.

이번에는 왜군들이 속지 않으려고 박을 모두 바닷가에서 수거해 가지고 와서 장작불을 피워 놓고 박을 모두 불 속에 넣었다. 이 때 불 속에서 폭약이 한꺼번에 폭발하여 그 근처에 있었던 왜군들이 몰살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여천군마을유래지-
현위치 : 율촌면 장도
정유재란때 순천 해룡면 신성포에 있었던 왜교성의 왜군을 교란하기 위해 빈 배에 대나무 다발을 올려놓고 돛을 달아 물때를 이용하여 대나무 다발에 불을 붙인 후 장도섬에서 왜교성에 배를 띄워 보냈다.

이 배가 왜교성 가까이 가면서 불이 붙은 대나무 터지는 소리가 총소리인줄 알고 왜군들은 그 빈 배를 보고 집중사격을 했다. 그러나 비 오듯 쏟아져 내리는 총포 속에서도 배는 계속 신성포 왜교성에 도착하여 화염에 쌓여 타버렸다.

이때야 왜군들은 속은 줄 알고 보복하기로 결심했다. 왜군들은 노루섬(장도)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이 신령한 섬이기 때문에 그 섬에서 언젠가는 반드시 왜군을 공격해 올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노루섬의 맥을 끊어야 한다며 마을 뒤쪽산을 깊이 파고 많은 장작을 놓고 불을 질렀다고 하는데 지금도 마을 뒷산에는 검은 흙이 나오는데 이것은 그 때 왜군들이 불을 질러 그렇게 된 것이라 한다.
-여천군마을유래지-
현위치 : 여수시 봉산동 일대
-쇠철 마을과 풀무골에 얽힌 전설-

「영명한 호국의 신이시여 이 민족의 성스러운 역사를 시련에서 구하오소서」백여명의 수군과 쇠철마을 백성들은 10여개의 용광로에 쇠돌을 채우고 풀무질로 녹여낸 쇳물을 받아 굳히고 있었다.
그리하여 굳어진 쇠는 두드리고 다듬어서 왜적의 침노를 박살낼 예리한 활촉과 거북선등에 꼽는 장못을 비롯한 각종 병기(창, 검)를 만들기에 주야의 가림이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3백89년 전인 조선조 제14대 선조25년 적장 풍신수길을 앞잽이로 한 왜적이 평화로운 이 강토를 침고, 무고한 백성을 학살하고 귀중한 우리의 재산을 노략질하던 임진왜란이 피로 얼룩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3도수군 절도사 충무공 이순신장군께서는 옥포, 노량, 고성 한산도 안골포 부산 등 해전에서 거북선으로 3백 여 척의 왜군 병선을 격파 이 땅을 넘보는 왜 오랑캐를 혼비백산케 하여 오금을 펴지 못하게 했다.
당시 시내 봉산동 5백 19번지와 5백41번지사이 3천 여 평의 당산일대에는 수 십 여 곳에 풀무간(대장간)을 차리고 우리의 삼도수군이 사용할 활촉을 땀 흘려 만들고 있었다.

수많은 수군과 이곳 백성들은 어른과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와서 서당산에서 캐오는 쇠 돌을 용광로에 넣고 높은 열을 가하여 뽑아낸 쇳물을 다시 굳혀 그를 두둘기고 다듬어서 하루에 수 천 개씩 우수한 활촉을 만들어 내었다.
이와 같이 하여 제작된 활촉으로 갈가마귀떼 처럼 병선을 타고 몰려오는 왜군을 무찌른 충무공 휘하의 수군들은 날로 사기가 충전, 승승장구의 전과를 거두기에 여념이 없었다.

「영명한 호국의 신이시여 이 민족의 성스러운 역사를 시련에서 구하오소서」활촉을 만드는 수군과 풀무골 백성들의 간절한 염원과 기도는 신의 가호아래 결코 헛되지 않았던 것이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아-이일을 어쩔꼬」측량을 불허할 만큼 많은 전과를 거두었던 충무공께서 명나라 수군과 합세 순천의 적을 봉쇄한 후 패퇴하는 적을 다시 노량에서 대파했으나 불행하게도 적의 유탄에 맞아 이 민족의 진로에 찬란한 광명을 다 뿌리지 못한 채 한 많은 운명의 날을 맞았으니-「아! 이일을 어쩔꼬.」
불구대천의 원수인 왜적을 남김없이 섬멸치 못하고 충무공이 눈을 감자 온 나라 백성들은 통곡으로 닥쳐올 국운을 염려했다.
물론 활촉을 만들던 풀무골 사람들은 한꺼번에 일손을 놓고 식음을 전폐, 비통한 시름에 잠겼음은 두 말의 여지가 없었으리라.
그런데 이런 통한의 슬픔이 강물로 흐르던 어느 날 밤, 풀무골을 관장하던 궁촉장 노인은 꿈을 꾸었다. 칠흙같은 적막한 삼경이었는데 갑자기 하늘이 두 조각으로 잘라지더니 난데없는 하얀 비가 쏟아지고 남쪽 예암산 너머 어디에 선가 애간장을 찢는 여인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온 동네를 흔드는 것이었다.
꿈을 깬 궁촉장은 이상한 예감이 들어 행장을 챙겨 급히 풀무골로 나가 보았다.
「아뿔싸」때는 늦었던 것이다.
하늘을 태우듯이 활활 타오르고 있어야 할 모든 풀무간에 불은 꺼져있고 활촉을 두드려 다듬던 대장장이들은 하나같이 깊은 잠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이 있고부터 풀무골 화덕에는 불이 붙지 않아 활촉의 제작이 중단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로부터 사철 쇠를 다루던 이 마을(봉산동)은 쇠철, 활촉을 만들던 이 지역 일대는 풀무골이라 불렀는데 그 당시 당산이었던 이곳이 수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은 민가의 집단 주거지역으로 변했고 이 부근에서는 현재도 땅을 팔 때마다 철석이 불에 탄 그대로 새까맣게 변한 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현위치 : 여수시 돌산 무술목
(1) 전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적이 이 지역을 침범해 오자 충무공 이순신장군은 무술목 양쪽에 있는 대미산과 소미산에 우리군사 300명을 매복 시켜 놓은 후 왜적을 이곳 무술목으로 유인하여 공격하니 왜적들은 좁은 수로에 갇혀 우왕좌왕 하다가 양쪽 산에서 내려오는 우리 복병이 이들을 공격하여 왜선 60척과 왜군 300명을 섬멸했다고 한다.
-여천군마을유래지-

(2) 무슬목의 지형이 쏙 들어가 있는데 여기에 이장군이 꾀를 썼다. 일본군한테 지도를 흘리기를 육지가 없고 탁 트인 것으로 해서 주었다. 그리고 일본군을 쫒아 포위를 해서 들어오니까 일본군이 도망을 하다가 막혀 땅을 파서 배를 뒤쪽으로 빼려고 했는데 그렇게 땅을 파다가 일본군이 많이 죽었다. 거기서 이장군의 계략에 걸려들어 가지고 일본군이 많이 죽었다.
현위치 : 여수시 율촌면 중산리
율촌면 중산리 수암산에 투구바위를 끼고 있는 산성으로서 높이 2미터, 둘레 약 250미터 정도의 석성으로서 축성 연도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장도에 진주하고 있던 왜군들이 이곳으로 올라오려하다가 그 때 마다 패하여 후퇴하였으며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천혜의 전략 요충지로 쓰였다고 한다.
-여천군마을유래지-

현위치 : 여수시 둔덕동
이순신이 십 이삼 세 때 친구들과 돌을 모아놓고 진법연습을 했다. 송구봉이 그걸 보고 있다가 집에 다녀가라고 했다. 이순신이 밤에 송구봉의 집에 갔는데 방에 누워있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송구봉의 방에서 구선도(龜船圖)를 보고 집에 왔다. 송구봉이 묵언으로 교지한 것이다. 여수 수사로 와서 여수 둔덕재의 솔을 가지고 거북선을 만들었다. 배를 만들었는데 여덟 개의 구멍 중 한 개의 용도를 몰라 송구봉에게 다시 가서 물었더니 그 구멍이 사청목(巳聽目) 이라 했다. 뱀은 눈으로 소리를 듣기 때문에 바깥의 말을 듣기 위해 한 구멍을 놔둬야 했다
현위치 : 여수시 삼일면
(1) 이순신장군이 군량이 없으니까 뽈록산의 나무를 전부 베고 날개를 이었다. 왜놈들이 그걸 보고 저렇게 군량이 많이 있는가 보다고 놀래서 도망을 갔다

(2) 이순신장군이 군량이 없으니까 뽈록산의 나무를 전부 베어 버리고 날개를 이었다. 왜놈들이 그것을 보고 "저렇게 군량이 많이 있는가 보다"고 놀래서 도망을 갔다. 노적산이라고 한다.
현위치 : 여수시 시전동
(1)이순신장군이 망마산에서 망도 보고 훈련도 시켰다. 훈련을 시킬 때 한 번은 빨간 옷을 입혀 한 바퀴 돌리고 또 한번은 흰 옷을 입혀 돌렸다. 군대가 많이 집결한 것처럼 해서 왜적들이 두려워 생각하게 하였다는 말도 있다.

(2) 망마산 건팽나무
망마산 가면 나무가 하나 서 있다. 이순신이 훈련하면서 쓰던 지휘봉이 그 때 저 나무다. 그 때 그 나무를 꼽으면서 "이 나무가 살면은 내가 살 것이고 만약에 이 나무가 죽으면 내가 죽을 것이다"고 했다.
현위치 : 상,하 화도
상화도, 하화도를 위꽃섬, 아래꽃섬이라 한다. 임진왜란 때 병사들에게 여자옷을 입혀 가지고 유인하면은 둔병도, 조발도에서 기습해서 잡았다. 조선성에서 왜놈들이 빤히 바라다 보이는데 거기서 빨간 옷, 파란 옷, 깔을 바꿔가며 돌았다. 색색으로 나오니까 수 천 명 같이 보여 왜놈들이 당황했다.
현위치 : 율촌면 장도,송도
신성포 야트막한 산 위에 있는 성은 한국에서 쌓아 놓은 것이었는데 우리 수군은 왜놈들에게 밀려서 거기를 뺐겠다. 그래서 왜놈들이 거기서 진을 친 것이었다. 그 때 이순신 장군은 하동의 대를 베어다가 짚을 펴놓고 짚 둥치안에 대를 다발 다발 넣어서 둥그렇게 묶어 야죽불울 만들었다. 노량 바다 쪽에서 신성포로 들어오며 불을 내논께 대 매듭 튀는 소리가 총소리보다도 무섭거든 하나도 아니고 수 십 개가 불이 붙어서 튀니까 "조선도 이렇게 무기가 많구나 우리 여기 있다가는 죽겠다"고 그것에 놀래서 그놈들이 다 달아나 버렸다. 그래 가지고 남해 노량강 거기서 빠져나가려고 할 때 이장군은 남해섬 저 건너 어디가 대기해 갖고 있었던가 적진으로 오다가 그 자리에서 그냥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이 남해 이내기에서 죽었는데 남해에서 진을 치고 있으면서 그 곳의 지명을 물었더니 이내기라고 했다. 이순신이 자기가 죽을 자리라고 했다. 이내기에 들어가 갖고 "여기서 죽을 거다"고 했다.

※ 왜놈이 쳐들어오는 길목에 철모를 놔두고 조선군인은 그것과 똑같이 생긴 바가지를 쓰고 다녔다. 왜놈들이 와서 보니까 한국 사람들이 전부 철모를 쓰고 다녔다. 길가에 철모가 있어 다섯, 여섯이 들어도 들을 수 없는 것을 한국 사람들은 한 사람씩 쓰고 다녔다. 조선 군대가 장사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이려고 그렇게 한 것 이었다.

※ 사람의 형용을 만들어 사람이 있는 것처럼 짚 둥치를 해 놓고 왜놈들이 거기에다 활을 쏘면 화살을 빼어 갖고 되쏘고 했다. 의병들이 그런 전술을 썼다고 한다.
왜놈들이 자물질을 해서 조선의 군함 밑을 뚫고 있었다. 이순신이 바다에서 놀고 있는 배를 보면서 문득 할아버지가 명심하라던 글귀를 생각해 냈다."伐木丁丁 山更幽요 毒龍潛處水偏淸이라"는 글귀였다. 이순신이 부하들을 시켜 "저 건너 앞산에 나무 비는 소리가 나는구나 창을 갖고 배밑을 더듬어 봐라"라고 시켰다. 과연 배밑 양쪽을 찔러대니까 피가 나왔다. 이순신 할아버지가 일러준 글귀 덕분에 왜놈들을 없앨 수 있었다.

산에서 나무 베는 소리가 쩡쩡 나는데 군함에 구멍을 뚫는 소리와 박자를 맞춰 소리를 냈다. 보통사람이 볼 때는 '초부가 나무벤다' 그랬을 것인데, 충무대감은 선견지명이 있어서"伐木丁丁 山更幽"란 고시가를 생각해 내서, 산에서 나무 베는 놈도 잡고 배밑을 조사해서 위기를 모면했다. 어디를 가서 배를 정박해 놓고 있는데 물이 매우 잠잠했다. "毒龍潛處水偏淸"이란 한시를 생각하고 배를 옮기게 하여 몰살을 면했다. 우리 같으면 '물이 좋으니까 쉬어가자' 그랬을 것인데 "독륭이 잠긴 곳은 물이 평범하지 못하다'고 하면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만큼 선견지명이 있는 양반이다.
(1) 이순신이 열여덟 살 때 활 공부를 하고 산에서 내려오다 목이 말라 처녀에게 물을 얻어 마셨다. 처녀가 그릇에다 나뭇잎을 따서 주었는데 이순신이 괘씸하게 여겨 처녀의 가슴에 활을 대었더니 물에 체할까 봐 그랬다고 했다. 후에 패랭이 쓴 영감이 와서 그 처녀가 상사병이 걸려 죽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순신이 이 말을 듣고 초상을 치루는 곳에 갔다. 밤이면 처녀가 앞 동을 서서 성공하고 안하는 것을 다 알게 되었다. 남해에서는 '실패하니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나가서 이내기에서 이순신이 죽었다. 이순신이 죽으면서 '죽었다고 말고 적을 쫒아라'해서 노량서 왜놈들도 못살고 말았다.

(2) 이웃집 처녀가 이순신을 사모했는데 신분이 달라 혼사를 꺼내지 못하고 상사병이 들어 죽었다. 뒤에 이순신이 그 소식을 듣고 그 시체를 하루저녁 부둥켜 안고 잤다. 나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전투가 치열할 적에 꿈에 영혼이 나타나 울둘목에 진을 치라고 현몽했다. 충무공이 울돌목에 가서 보고 정말 진을 칠 요새지라고 느꼈다. 거기서 배 열두 척을 가지고 적함 삼백 척을 무찔렀다.